2011년 4월 17일 일요일

2011년 4월 12일 챔피언스리그 8강전 맨유 Vs. 첼시 전 후기

운 좋게 티켓을 구해 챔피언스리그 8강전 맨유와 첼시 사이의 2차전을 관람할 수 있었다.

출발하는 날 점심까지 런던으로 돌아오는 기차도 버스도 예약 실패,
맨체스터 시내 호텔도 전부 풀 부킹..
할 수 없이 같이 가는 친구에게 좀 더 신세를 지기로 결정했다.
그 친구차로 맨체스터에서 한시간 떨어진 곳에 있는
도시의 호텔로 이동해서 하루 자고 돌아 왔음.

멀리서 모습을 드러내는 올드 트래포드의 위용.
칠만오천명을 수용하는 경기장인데,
잠실야구장에 삼만명이 들어갈 수 있는거에 비하면 엄청 클 줄 알았는데,
축구 전용구장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크진 않더라.
느낌상 크기는 잠실야구장이랑 비슷했던 거 같음.

여유있게 출발했는데 맨체스터 근처에서 길이 엄청 막혀서
눈썹 휘날리게 뛰어 가는 중.






늦는 바람에 주위를 둘러볼 경황은 없었지만 그래도 Matt Busby (발음을 모르겠다. 버스비? 비스비? 버즈비?) 경의
동상 사진은 얼른 찍고 들어갔다.
현 감독인 퍼거슨 경 이전에 맨유 감독직에 가장 오래 있었던 인물로
1958년 2월 뮌헨 비행기 추락 사고의 생존자이기도 하다.
뮌헨 비행기 추락사고는 1950년대말 맨유의 전성기 시절
유고슬라비아에서 유로피언컵 참가 후
급유를 위해 뮌헨에 들렀다 발생한 사고인데,
주축 선수들 8명이 사망하고 다른 선수들도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Matt Busby 경도 거의 죽다 살아 났다고 하니 그 충격은 상상하기 힘들었을 텐데,
팀을 다시 재건해 1963년에 리그 우승을 했으니 대단한 지도자였던 듯 하다.
1965년, 1967년 리그 우승에 이어 1968년 유러피언컵 우승까지 하면서 퍼거슨 경 이전 맨유의 전성기를 만들어 낸다.



자리는 하프라인 근처, 가운데 높이 정도 되는 상당히 괜찮은 자리였다.
축구 전용구장이라 경기장이랑 관중석이 정말 가까운데
그라운드 바로 옆은 경기를 감상하기에는 안 좋아서 가격이 좀 더 싸다고 하더라.
감상이랑 상관없이 지성이게 고함 지를 수 있는 그 자리가 탐나긴 하던데,
가격을 떠나서 맘대로 구할 수 있는 티켓들이 아니라
지금자리도 감지덕지.
눈 앞에서 웨인 루니, 라이언 긱스, 애쉴리 콜, 드록바, 박지성이 뛰어다니고 있다.
박지성 선수 역습 중, 뒤로 뛰어들고 있는 웨인 루니!



티켓 가격은 쏘쿨하게 구글링 해바라 라고 말하고 싶으나
쿨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가격은 아니다.
프리미어 선수들의 천문학적인 몸값은
천문학적인 티켓 수입도 일조를 하고 있다.
내가 갔던 자리의 공식 가격은 350파운드.
지금 환율로 63만원이네.
경기전날 급하게 나온 거라 난 좀 싸게 사긴 했다. --;
그래도 미친 가격...
그냥 프리미어 리그 시합은 그것보다 싸긴 한데
그래도 맨유, 리버풀, 첼시 등 빅 매치들은 돈 이삼십 만원은 우습게 넘는다.

선수들 제대로 안 뛰면 욕 먹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그 돈 내고 들어온 7만명의 인간들..
평균단가 63만원에 7만명이면 이날 하루만 441억원이다.
챔피언스리그 4강 올라가서 최소한 두 경기 더 뛸테니
입장료에 중계권료에... 수입이 어마어마 할 듯.


위에 걸려 있는 현수막은
Manchester is my heaven
Feb 6th 1958 the Flowers of Manchester
Giggs Tearing You Apart Since 1991

The flowers of Manchester는 1958년 뮌헨 비행기 추락사고의 희생자들을 지칭한다.
5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아직도 기억되고 있는 그들.
사진 찍을 때는 몰랐는데 사연을 알고 나니
롯데의 임수혁 선수가 생각나서 가슴이 찡하네.
오른쪽에 현수막 하나가 더 있는데, 역시 그들을 위한 문구이다.
Lest we forget

축구시합 관람기가 아니라 로마 여행기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는데.. --;
느낀 바가 그렇다.
축구만 즐기려면 집에서 리플레이 봐가며 보는게 나은 듯 하다.
이번에 가보니 시합 자체도 감동적이었지만 그보다도 축구와 프로 스포츠를 둘러싼
이런 저런 생각들이 많이 떠오르더라고.

나름 영국의 홀리건 문화가 어떤가 궁금하기도 했는데
관중석 분위기는 차분 그 자체..



60만원씩 내고 들어올려면 아무래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아저씨들이나 가능할 듯.
근데 롯데의 깽판 응원도 주로 아저씨들이 저지르는데
입장료 차이 때문인지 뭔지..
그래도 첼시 선수들 코너킥 할 때는
바로 뒤에서 미친 듯이 욕하고 야유 보내는데
열받은 축구 선수들이 관중석 뛰어드는게 이해가 되긴 하더라.

사실은 영국이 홀리건 단속을 워낙 엄격하게 해서
경기장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첼시 응원석이 구석탱이에 조그맣게 있는데 주위에 경찰들이 완전 둘러싸고 있었음.
경기장 밖에도 기마경찰부터 해서 경찰들 엄청 깔려 있고...
이탈리아 리그는 아직도 홀리건들이 활개친다고 하니
그 쪽에 관심있는 친구는 이탈리아로 가봐야 할 듯.

여기는 치어리더도 응원단장도 없다.
가끔 나오는 짧은 응원가나 누군가가 외치는 구호를 따라 하는게 다인데,
신기하게도 롯데 구호랑 응원가랑 비슷한게 많더라.
유럽 축구 응원을 국내 프로축구단이 들고 오고
그걸 다시 프로야구에서 들고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거 같은데 사실인가 보다.

경기 이야기를 좀 하자면
박지성은 수비는 끝내줬는데
공격 공헌도가 넘 낮아서 전반에는 옆에 영국애들한테 미안할 지경이었음.
열심히 뛰기는 하는데 웨인 루니나 라이언 긱스가 활약했던 거에 비해서는 좀...
사실 웨인 루니랑 비교한다는게 이미 대단하다는 증거긴 하다만.


그래도 첼시의 역습에서 박지성이 워낙 잘 막아줘서
비기기만 해도 되는 상황에서 박지성이 빠지진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는데
역시나 후반에도 나니 대신 발렌시아가 투입되면서
박지성이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드록바의 무시무시한 한방이 터진 직후
맨유의 공격.
모두의 시선이 오른쪽의 라이언 긱스에 쏠린 사이
공이 왼쪽편으로 날아가는데,
그곳으로 뛰어들고 있던 박지성.

가슴으로 트래핑한 후,
땅에 한번 튄 공을 왼쪽 발로 차니
낮게 깔리면서 골키퍼를 지나 골망으로 빨려 들어가는데,
슬로우비디오 처럼 펼쳐지던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경기 스코어는 2대 1 맨유 승리.
박지성이 풀타임으로 뛴데다 결승골까지 넣어줘서
정말 돈이 아깝지 않더라.
경기 종료 후 카메라 독차지 중인 박지성 ㅎㅎ




롯데가 이기고 나면 경기장에는 온통 부산갈매기와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넘쳐 흐르고
기분 좋아진 팬들은 여기저기 모여서 2차를 어디로 갈까 상의하는데,
여기는 그런 게 없더라. 불과 10분 사이에 차분하게 다 빠져 나가더라구.
선수들도 경기장 나와서 팬들에게 인사하는 것도 없고 그냥 끝.

숨쉴 틈 없는 경기를 보며 축구는 전쟁이라는 말이 다시 한번 떠 올랐다.
90분간 지치지 않고 뛰어다니는 병사들과 빈틈 없는 수비조직,
그걸 뚫기 위한 치열한 공방들..

토레스가 넘 존재감이 없어서 그렇지,
첼시의 수비조직은 처음부터 끝까지 감탄스러웠고
두 골이나 넣은 맨유가 너무 잘 한거라는게 내 느낌이다.
그리고 반 데르 사르 골키퍼도 대단했음.
두어골 더 나올 뻔한 상황에서도  잘 막아 내더라구.

경기 종료 후 순식간에 정리된 경기장.
치킨 봉다리도 맥주캔도 없고
여기가 불과 10분전에 챔피언스 리그가 펼쳐진 곳인가 싶다.




경기장을 나와서 기념품 가게에 갔는데
규모도 엄청 크고 사람도 바글바글 하더라.
맨유의 돈 버는 기술은 축구만큼 대단한 듯.
박지성 공식 유니폼 한벌에 13만원이라 바로 포기하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태원에서 한벌 장만하기로 했다. ㅎ

참고로 숙박했던 도시 바로 옆에 조그만 마을이 있는데,
이름이 웨지우드다.
오늘 아침 아웃렛 가서 영국에서 처음으로 와싸다! 라는 감탄이 나왔음.
포트메리온 아웃렛도 괜찮았음.

글이 좀 길어 졌구나.
한줄 요약.
싸고 재미난 잠실 구장 더 자주 가야지.